이중섭과 서귀포
이중섭은 한국의 국민화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어느 예술가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굴의 창작열을 불태우며 우리에게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이중섭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림에서 손을 떼지 않았으며, 그림 재료의 선택에 있어서 어떠한 구애도 받지 않았다. 특히 1956년 뉴욕 근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에 소장된 은지화 3점은 이중섭의 예술성과 끊임없는 창의성을 잘 말해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중섭을 비롯한 많은 문화예술인이 제주에 피난을 왔다. 이들 피난민 예술가들은 제주에서 제자를 양성하기도 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제주미술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중섭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원산에서 피난길에 오른 것은 1950년 12월 초순이었다. 그때까지 그린 많은 작품은 함께 피난 가지 못하는 어머니의 손에 쥐어주며 “저로 생각하여 잘 보관하세요.”하고는 채 완성하지 못한 풍경화 한 점을 들고 피난길에 나섰다. 부산에서 약 한 달을 머문 후에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서귀포에 도착한 것은 1951년 1월 중순경이었다. 서귀포로 향해 걷는 동안 눈발이 세차게 몰아칠 때면 농가의 소외양간에서 눈보라를 피했다. 이때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작품 <피난민과 첫눈>은 1955년 이중섭이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때 전시가 되었다.
이중섭 가족이 서귀포에서 머문 곳은 알자리 동산에 있는 초가집으로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왼쪽으로는 섶섬이 보이고, 그 옆으로 문섬과 새섬이 보이는 곳이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예술창작의 중요한 두 축이 된다. 시간은 의식을 변화시키고, 공간은 작품의 무한한 소재를 제공해준다. 이중섭에게 주어진 서귀포라는 공간에서의 시간은 이중섭 작품 세계의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 되고 있다. 이중섭 그림의 주요한 모티브로 작용한 아이들과 물고기, 게, 가족 등은 바로 서귀포라는 공간에서 더욱 친근해진 소재들이다. 이 소재들은 섬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보낸 시간의 흔적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거주하는 동안 서귀포의 풍광과 바다를 소재로 한 감명 깊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서귀포 시대 이후에도 서귀포 관련 소재들은 끊임없이 이중섭 그림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이중섭의 대표작을 탄생시키는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피난민 배급으로 연명하던 당시 피난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서귀포 시대는 꿈꾸는 이상향으로 묘사된다. 그 이상향 속에서 가족들이 유쾌하게 묘사되는 것은 전쟁의 가난과 공포를 잊고자 하는 이중섭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시시각각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전쟁이 소에게도 안정감을 줄 리 없다. 그러나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관찰한 소는 비교적 평온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중섭은 원산에서처럼 서귀포에서도 소도둑으로 몰릴 정도로 소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다.
이중섭의 소 작품은 골격을 놓치지 않는 정교한 데생력, 탁월한 붓 터치에 의한 선묘의 속도감, 역동적인 소의 동세(動勢)로 인하여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이중섭의 명성을 가져다준 소 작품들은 1953년 이후 주로 통영에서 그려진 작품들이다. 이중섭이 서귀포를 떠난 지 2년 만에 그토록 힘차고 훌륭한 소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서귀포 시대에 많은 습작을 통해 소의 구상을 마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 작품 못지않게 중요한 작품 은지화(銀紙畵)는 시대를 말할 때, 그리고 이중섭의 삶을 이야기할 때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 양식인지 모른다. 은지는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던 궁핍함 때문에, 그리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담배를 많이 유통시켰던 당대적인 이유로 선택된 재료 중 하나이다. 은지화는 아이들과 게, 가족 등 서귀포 피난 생활과 관련이 깊은 소재와 능숙한 이중섭의 데생력이 결합하여 이루어낸 이중섭의 독특한 회화 양식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다, 아이들, 게, 물고기 등의 소재들은 은지화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 뒤엉켜 있다. 서귀포에서 더욱 친숙해진 이 소재들은 이중섭 그림의 강한 모티브로서 작용했다. 특히 이중섭의 서귀포 시대 소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게였다. 배가 고파 게를 많이 잡아먹다 보니, 그것이 미안하여 게를 그리게 되었다는 화가의 말은 곧, 게를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음을 의미한다.
이중섭의 서귀포 시대는 불과 1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서귀포 관련 소재들은 서귀포를 떠난 이후에도 이중섭의 유화나 은지화에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이중섭이 가족의 사랑을 더욱 심도 있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족과 함께 보낸 ‘마지막 행복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던 서귀포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생애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귀포 시대와 관련한 이중섭의 그림들은 따뜻하고, 해학적이고, 즐겁고, 포근한 사랑으로 표현됐다. 서귀포 시대와 그 이후의 그림들이 전쟁이라는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이상세계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전쟁기임에도 불구하고 서귀포에서 가족과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