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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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중화 (玄中和)

대한민국 서예가

  • 출생 1907년 7월 4일
  • 사망 1997년 12월 3일
  • 소암(素菴), 서귀소옹(西歸素翁) 등
  • 분야서예
  • 시대근현대

소암 현중화는 의생(醫生)이셨던 부친에게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혔다. 제주공립농헙학교 중퇴 후 1925년 도일하여 동경소압상업학교(東京巢鴨商業學校)를 거쳐 1932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영화 자막 쓰는일, 일본 국회사무실, 광산회사 사무원 등으로 일하다가 1937년 일본의 서도대가 마츠모토 호스이(松本芳翠) 문하게 들어가 3년간 수학하였고, 스승의 친구였던 쓰지모토 시유우(辻本史邑) 문하에 입문하여 8년간 육조체(六朝體)와 해, , , , 예 등을 두루 익혔다.

1945년부터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마이니찌 신문 주최 전람회(每日展)에서 3회 연속 수상했고, 전일본서도전(全日本書道展)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1946년부터는 도쿄에서 녹담서원(鹿潭書院)을 개설하여 운영하였고, 오사카로 이주한 후에는 여러 곳에 출강하며 서예를 지도했다.

1955년에는 귀국하여 제주사범학교와 서귀포중학교에서 재직하였고, 1957년 국전 입선 후 1959년 부터는 추천작가로 선정되었으며 1963년을부터 여러 차례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66년 목포에서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광주, 여수, 부산, 마산, 제주, 서귀포 등 여러 차례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1973년 제주소묵회(濟州素墨會)를 창립하여 후진의 지도와 양성에도 힘썼다. 그 뒤 목포, 서귀포, 대구, 광주에도 소묵회 지부가 세워졌다.

1982년에는 중화민국 서법계(書法界)를 순방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중화민국 국립역사박물관 주최로 초대전을 가졌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과 소묵회전 등에 주력했고, 1992년에는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주최로 개인전이 열리기도 했다.

1995년부터는 조범산방에 칩거하며 서법연마와 작품창작에 전념하였고, 1997123일 영면(永眠)하였다. 장례는 서귀포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서예와 문화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1969년 제주도문화상, 1991년 서귀포시민상, 1997년 광주광역시 주관 의재 허백련 미술상 등을 수상하였고, 2008년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고 기리기 위한 소암기념관이 개관하였다.

  • 1907년 음력 7월 4일 제주도 서귀포시 법환동 248번지에서 연주현씨(延州玄氏) 지준(至濬)과 곡산강씨(谷山姜氏)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
  • 1919년 서귀포공립보통학교(현, 서귀포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학.
  • 1923년 서귀포공립보통학교 졸업. 제주공립농업학교(현, 제주농업고등학교) 입학 및 1학년 중퇴. 남평(南平) 문씨(文氏)와 결혼, 장녀(長女) 성숙(性淑) 출생.
  • 1924년 도일(渡日). 대판(大阪) 자강학원(自剛學院)에서 중학교 편입학 준비.
  • 1925년 영국 기독교 장로계 사립 도산중학교(桃山中學校)에 입학, 3학년 졸업.
  • 1928년 동경소압상업학교(東京巢鴨商業學校)에 입학. 4학년 때 노자 도덕경 강의 수강으로 노자철학에 심취.
  • 1932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과(政經學科) 전문부(專門部) 입학, 2학년 졸업.
  • 1934년 동보영화주식회사에 취직(자막 쓰는 일을 하다).
  • 1935년 일본 국회 사무실, 광산회사 사무원 등을 전전. 하이쿠 작가(俳句作家)인 등굴내(登堀內) 여사와 결혼, 2남2녀를 둠.
  • 1937년 일본 서도대가 마츠모토 호우수이(松本芳翠) 선생 문하에서 3년간 사사(師事).
  • 1940년 쓰지모토 시유우(辻本史邑) 선생 문하에 입문 8년간 사사. 특히 육조체(六朝體)와 해, 행, 초, 전, 예 등 각 체를 배우며 많은 영향을 받음.
  • 1945년 매일전(每日展)에 연 3회 수상, 전일본서도전(全日本書道展)에 1회 수상, 기타 민전에 출품하여 8회 수상. 이 시기에는 주로 예서(隸書)위주로 출품.
  • 1946년 녹담서원(鹿潭書院) 개설. 재단법인 일본 서도원 대의원 역임.
  • 1948년 1953년까지 6년간 동경태동구(東京台東區) 재일거류민단 부단장 겸 총무 역임.
  • 1953년 대판 이주 후 도산병원(桃山病院) 등 출장지도, 관서지방 서도연구단체 연묵회 회원 활동.
  • 1955년 귀국. 제주사범학교에서 한문 및 서예를 가르치며, 제주대학에 윤리학 강의 출강.
  • 1957년 서귀중학교로 이직. 예서작품 십오야망월(十五夜望月)로 제 6회 국전 입선
  • 1959년 제 8회 국전에 추천작가(推薦作家)로 선정. 김해(金海) 김씨(金氏) 덕인(德仁) 여사와 결혼.
  • 1960년 제 9회 국전에 추천작가로서 금강산갈성루(金剛山歇惺樓) 출품. 자(子) 영모(榮謨) 출생.
  • 1961년 제 10회 국전에 추천작가(推薦作家)로서 서산대사시(西山大師詩) 출품.
  • 1963년 제 12회 국전에 심사위원(審査委員)으로서 유금강산등산영루(遊金剛山登山映樓) 출품.
  • 1965년 제 14회 국전에 추천작가로서 추일우성(秋日偶成) 출품. 청탄 김광추(聽灘 金光秋) 선생과 영주 연묵회(瀛州 硏墨會) 발기.
  • 1966년 제 15회 국전에 추천작가로서 가친 해암시(家親 海菴詩) 한라산(漢拏山) 출품. 제자 박건복(朴建馥)의 주선(周旋)으로 목포(木浦)에서 제1회 개인전(個人展) 개최.
  • 1967년 제 16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가친 해암시(家親 海庵詩) 정방하폭(正房夏瀑)출품. 서귀중학교 퇴임. 제 2회 개인전 (목포) 개최. 가친 지준공 별세(84세)
  • 1968년 제 17회 국전에 추천작가로서 삼일포(三日浦) 출품. 광주에서 제3회 개인전 개최. 의재(毅齋)과 당호(堂號) 춘설헌(春雪軒)과 조범산방(眺帆山房) 교환.
  • 1969년 제 18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처세훈(處世訓) 출품. 제주도문화상 수상. 한라문화제 기간에 제주 청자다방에서 초대전, 서귀포 초원다방에서 재전 개최.
  • 1970년 제 19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한글 서예 성삼문 시 절개가(節槪歌) 출품.
  • 1971년 제 20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한글 초서 이순신 장군 시 단장가(斷腸歌) 출품.
  • 1972년 제 21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정방폭포(正房瀑布) 출품. 대부인 곡산 강씨 86세로 별세.
  • 1973년 제 22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서 가야산(伽倻山) 출품. 광주에서 4회 개인전 개최. 여수서도회 기금조성을 위한 전시. 제주소묵회 창립.
  • 1974년 제 23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장안사동구(長安寺洞口) 출품. 문공부 주최 원로작가 초대전에 출품. 마산에서 제 5회 개인전 개최.
  • 1975년 제 24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진묵선사시(震黙禪師詩) 출품. 부산에서 제 6회 개인전 개최.
  • 1976년 제 25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초서 유금강산(遊金剛山) 출품. 목포소묵회 창립 및 지도
  • 1977년 제 26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금강경서(金剛經解序) 출품. 전남도전에 심사위원으로 월야(月夜) 출품. 한일서예교류전 출품. 서귀포소묵회 창립 및 지도
  • 1978년 제 27회 국전에 연영춘첩(淵永春帖) 출품. 전남도전에 심사위원장으로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현대미술대전, 청림회(靑林會) 창립전 출품.
  • 1979년 제 28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고시(古詩)출품. 중화민국기융시서법연구회전, 청림회전 출품.
  • 1980년 국전 활동을 중단. 국제미술교류전 및 제 3회 청림회전 출품, 대구소묵회 창립 및 지도.
  • 1981년 제주시 남양미술관 초대전 개최. 광주소묵회 창립 및 지도. 전소묵회제주전 지도 및 출품.
  • 1982년 서귀포 상미다방에서 초대전 개최. 중화민국 서법계(書法界) 순방(巡訪).
  • 1983년 중화민국 국립역사박물관 초대전 개최. 법화사 복원기금 조성 찬조출품.
  • 1984년 전소묵회대구전 지도 및 출품. 중화민국 국립역사박물관 초대전 작품을 대구, 광주, 목포, 제주, 서귀포에서 개최. 추사적거지 기금조성을 위한 초대전 출품.
  • 1985년 전소묵회광주전 지도 및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에 퇴계선생 시 출품.
  • 1986년 전소묵회목포전 지도 및 출품.
  • 1987년 전소묵회제주전 지도 및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출품. 마산 동서화랑 묵적전 개최.
  • 1988년 전소묵회서귀포전 지도및 출품. 예술의전당 한국서예백년전, 국제현대서예전 출품.
  • 1989년 소묵회에서 소암현중화서집(素菴玄中和書集. 東山出版社) 발간. 전소묵회마산전 지도 및 출품.
  • 1990년 예술의전당 주최 한국서예국전삼십년전 출품. 전소묵회광주전 지도 및 출품.
  • 1991년 서귀포시민상(예술부문) 수상. 전소묵회목포전 지도 및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출품.
  • 1992년 전소묵회제주전 출품. 예술의전당 소암현중화서예전 개최. 도록 소암현중화서예전 발간.
  • 1993년 전소묵서귀포전 출품. 제주도문화진흥원 초대 소암현중화서예전 개최.
  • 1994년 미수(米壽)기념 소암현중화소품소장전(素菴玄中和小品所藏展) 개최.
  • 1995년 전소묵회제주전 출품. 조범산방에 칩거하며 서법연마와 작품창작에 전념.
  • 1996년 전소묵회제주전 출품. 노환 증세로 서귀포의료원 입원.
  • 1997년 3월19일 뇌경색 발병, 11월28일 광주 제3회 의재미술상 수상. 12월3일 00시30분 영면(永眠). 12월8일 서귀포시 사회장 거행. 대교곡 세장산 유좌 안장
  • 2007년 소암 현중화 탄생100주년 기념전 - 소암의 삶과 예술(예술의전당 주최, 서울서예박물관)개최. 11월30일 소암기념관 건립 완공.
  • 2008년 소암 현중화 탄생 100주년 기념전(한국문화원 주최/주일대한민국대사관 한국문화원)개최. 10월4일 소암기념관 개관 및 개관기념전 개최.

한국 근현대 서단에서 소암 서(書)의 위치와 성격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

지극히 단적인 사례지만 필자는 이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이유는 이것이 소암예술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가 어떤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잣대가 한국 근 현대 서예의 역사적 전개맥락을 재는 척도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얼마 전 이번 소암 현중화 전시도록제작 건으로 몇 몇 서예 전문잡지사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관계지들은 '지방작가라 판로가 없다' 며 거절했다. 제주도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지방작가인 것은 옳다. 하지만 '지방작가' 란 말에는 '중앙작가'가 아니라는 가시가 박혀있는 듯했다. 여기서 지방과 중앙의 구분배경은 사실 지역이나 작품성보다 공모전 서숙의 영향력에 근거하여 세력이 일 마인가 하는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소암을 지방작가로 치부하고 덮어두기에는 간단치 않은 점이 많다. 그 이유는 소암의 일본에서의 학서과정(學書過程)과 국전(國展)을 통한 성숙기, '서귀소옹(西歸素翁)' 시절 독자적인 예술세계 완성궤적을 추적하는 것은 한 예술가로서 소암의 성취를 넘어 한국서예의 역사적 전개맥락에서 근 현대를 성격지유는 데 필수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소암예술에 있어 일제시대 일인(日人)을 사숙(私刹)하며 근20년간 일본서단에서 활동한 진의(眞意)와 국내복귀 후 근 20년간 서단정치의 중심인 '국전(國展)'을 무대로 추천•초대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작품' 으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하는 문제는 한 예술가로서 소암을 평 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한국 근 현대 서예역시에서 소암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먼저 소암예술의 형성과정과 성격을 보고자한다. 이와 동시에 한국 근 현대 서예역사의 전개과정을 개괄적으로 고찰하고 소암글씨의 위치와 성격을 역사적 전개맥락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소암예술의 형성과정은 생애시기와 작품이력에 따라 크게 다음 과 같이 4시기로 구분할수 있다.

  • • 제Ⅰ기 성장기(成長期) [ 1세(1907)-31세(1937)]
  • • 제Ⅱ기 학서기(學書期) [31세(1937)-49세(1955)]
  • • 제Ⅲ기 성숙기(成熟期) [39세(1955)-73세(1979)]
  • • 제Ⅳ기 완성기(完成期) [73세(1979)-90세(1997)]

이 중 한국 근 현대 서예사의 전개맥락에서 소암의 위치를 가늠함에 있어 1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제Ⅱ기 학서기(學書期)로 소암 31세(1937)부터 49세(1955)까지 근 20년간의 기간이다. 그 이유는 이 시기 소암이 일본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그것이 우리나라 근 현대 서예사의 전개맥락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근 현대 서예역사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 누구에게 배웠는가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그 다음은 소암의 국내복귀 후 본격적인 활동무대가 된 49세(1955)부터 73세(1979)까지 근 20년간의 '국전시기' 로 제 Ⅲ기 성숙기(成熟期)이다. 이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일본서단에서 글씨토 된 것이다 그리고 쿠사카베 메이가쿠의 예서첩(隸書帖)을 중심으로 청나라 말기의 예서풍을 탐방하였다. 일본에서 소암이 각종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은 예서가 주류를 이루었고 귀국 즈음에 츠지모토 시유우가 소암에게 "자네는 내가 아는 조선인 중에서 가장 서(書)를 잘한다. 귀국하면 조선의 글을 새로운 서체로 개발해 보게" 라고 하였다. 소암이 귀국 후 한글을 전서 예서 초서형식으로 간간히 내보인 근저에는 츠지모토 시유우의 그러한 조언이 작용했으리라. 고전이란 고전을 모두 섭렵하려는 츠지모토 시우유의 자세에서 소암은 고전임서(古典臨書)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마츠모토 호우수이, 츠지모토 시유우의 일본서단에서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그들로부터 서학(書學)을 시작한 소암은 귀국 후 독자적으로 자신의 탐구에 대한 강한 주장을 하게 되는 세 번째 의식의 전환이 있게 된다.

일본에서의 서예활동에 사용되었던 아호(雅號)가 “녹담(鹿潭)" 또는 한라산인(漢拏山人)”이었다. 이 호에 그의 민족적 자부심과 근본에 대한 자긍심이 존재하였다. 귀국 후에는 '소암', “소운(素芸)", “소암우인(素菴迂人)”이라고 호를 사용하였고, 고희(古稀) 이후로는 “서귀소옹(西歸素翁)”을 주로 서명하였다. 귀국 후부터 예서보다는 육조와 행•초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왕희지를 중심으로 명말-청초의 낭만주의적인 서풍까지 그 표현력을 탐구한다. 표현이란 개인의 해석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므로 고전도 각각으로 작가의 내면에 동화되는 시점에서 처음으로 작가와 고전의 접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전은 개념으로서 보편성을 보유하고 있으나 작가는 개인에 있어서 그 보편성을 어느 정도 박진(迫眞)하게 보유할 수 있을까? 개념만으로는 감동을 불러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암은 “글씨는 보는 이의 혼을 빼앗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러한 그 무엇이 글씨 속에 존재하여야 만이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또 그는 “이를 위해서는 고전에 대한 공부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만하냐가 관건이 된다.”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결국 표현공부의 문제인 것이다.

현란하게 각종 각양의 광분스러운 표현법이 난무한 전후(戰後)의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위치변경을 할 때 소암의 눈에 보인 한국 현실은 어떠했을까. 간혹 "미취광(未醉狂)”, "주광(酒狂)” 등으로 희화적으로 작품에 서명한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유추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엄밀히 핵실(覈實)하여 말한다면 내면의 문제이다. 그 내면의 문제 중에서도 서(書)에 대치된 자신의 의식 즉 표현의 방법에 대한 갈등의 일단인 것이다. 고전에 손때가 묻어가는 시행이 계속되면서 그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고전(古典)의 진면목(眞面目), 다시 말하면 실상(實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동시에 표현의 토대를 높이는 만큼 기술의 연마를 하였을 것이다. 소암은 항상 "나는 임서를 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임모(臨模)하는 자세가 작가의 생명임은 두말할 나위없다. 생애를 임서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 이것은 자기(自己)의 표현(表現)과 고전(古典), 그것을 병치(竝置)하면서 겸허하게 자신을 확인해 나아간 것이 아닐까.

소암의 서(書)는 먼저 개결탈속(介潔脫俗)하고 인장력 있는 필획(筆劃)에 냉정(冷靜)한 정신성(精神性)이 서려있다. 그러면서도 선(線)의 진폭은 대단히 격정적(激情的)이다. 대상(對象)에 대한 감동의 진폭을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의식은, 필획의 율동에 나타나면서, 개개 점획의 성질에서는 냉엄한 이성의 통제가 있다. 어쩌면 배반적인 두 성질이 길항하며 보는 이의 마음을 삽상(颯爽)하게 만든다. 완고(頑固)함이나 취약(脆弱)함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착종(錯綜)보다는 명쾌함이 공간을 주도하고 표일(飄逸)한 기운이 속진(俗塵)을 거두어내는 어떤 설득이 그곳에 굼실거리고 있다. 이것이 그의 시대에 대한 물음이고 반응이다. 그러나 이러한 청경(淸勁), 수월(秀越)함이 때로는 격정적인 역동감을 내보이고 있음에 우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이 시대에 대한 반동(反動)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의 선질(線質)은 놀라울 정도로 개결성(介潔性)을 지니고 공간을 점유하여 가는데 그 광경은 확실히 무애(無碍)한 자재력(自在力)을 가득 담고 있다. 그러한 청경(淸勁)한 선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명징(明澄)함은 무엇이라고 뚜렷이 말할 수 없는 냉정(冷靜)한 공기를 운반하고 있다. 사실 서(書)에서 선(線)이 격정적(激情的)으로 되면 될수록 공간은 정사적(靜思的)인 침묵을 보유하게 된다. 선의 운동량과 폭의 넓이만큼 공간의 정적(靜寂)은 소암의 작품에서 일격미(逸格美)를 가져오고 있다. 나는 때로 그의 선들이 조합한 공간에 빨려들어 그 선의 움직임이 일구어내는 율조(律調)의 서정(抒情)에 동화(同化)되는 환상(幻想)에 젖어든다. 종횡무진의 점획은 나의 혼을 흔적없이 흩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자각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이러한 서(書)의 공간이 현대의 혼잡한 물질문명 가운데 남아있는 유일한 정신의 쉼터가 아닐까?

소암의 선(線)과 공간은 확실히 현대인이 아는 불안(不安)과 반항(反抗)을 잠재울 수 있는 안식처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조용한 문제(問題) 제기(提起)이기도 하다 명징(明澄)한 추수(秋水)에 월면(月面)이 인(印)박히듯이 바닥은 있으되 그 밑바닥이 관통되어 무한(無限)으로 빨려드는 무애(無涯)의 정신성이 명경(明鏡)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곳에는 어떠한 욕망도 사라져 그림자조차 남지 않는 허실백생(虛室白生)의 생광(生光)이 존재하고 있다. 소암의 서(書)는 그러한 의미로서 현대인이 갈망하고 회구하는 한 면을 훌륭히 구상화시키고, 동시에 그것으로 평안을 주고 있다.

소암의 서(書)는 감성(感性)과 의식(意識)의 충돌을 넘어서 새로운 이성(理性)의 구축과 신뢰가 있다. 논리적으로 습득한 표현법(表現法)에 의한 자미(滋味)가 있고 그와 동시에 어떤 비합리(非合理)한 상상의 풍부함도 있다. 또 창조의 신비에 대한 경건한 기도를 그는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전통과 고전에 대치시킨 자기의식으로 표현의 모색(摸索)에 있어 성실(誠實)히 인생을 영위한 한사람의 현대서가(現代書家)로서 진실로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귀일(昰느)한 가식 없는 존재(存在), 즉 서귀소옹(西歸素翁)이었음을 나는 진지하게 믿는다.

대를 다진 소암이 한국서단에서 ‘어떻게’ 자기세계를 펼쳐가고 있었는가를 가장 여실히 보는 주는 시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소암의 예술형성궤적의 종지부로서 그 완성기에 해당하는 제 Ⅳ기의 성취는 작가 개인의 성취도 성취이지만 이를 넘어서는 역사적 가지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제I기 성장기(成長期)[ 1세(1907)-31세(1937)]

소암의 성장기는 다시 두 시기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주로 소암이 유년기에 가학(家學)을 통한 한학(漢學)과 불경(佛經),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鈗)의 서체본과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등 시체(時體) 중심의 문장과 글씨를 습득하였던 시기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소암이 18세(1924년)에 도일(渡日)하여 26세(1932년) 무렵 학비 마련을 위해 하세가와죠지로(長谷川長次郞) 변호사 집에서 서시(書士)를 하거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政經學部)를 졸업하고 동보영화사에서 자막 쓰는 일을 한 때이다. 요컨대 소암의 성장기는 아직 본격적인 서가로서 면모는 보이지 않지만 글씨에 남다른 재능과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히 간취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경학부를 졸업한 소암이 왜 의외라고 볼 수밖에 없는 서예로 전향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이 글씨 쓰는 일에 대해 ‘이 길이다’ 라고 판단한 것은 서예가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 글씨로 일본을 이겨야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고,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던 거지요. 그래서 글씨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소암에게 있어 글씨는 독립운동이다. 글씨를 통해 일본은 물론 중국까지도 아우르는 서예세계를 평정하는 것이 소암이 붓을 든 이유로 보인다. 특히 글씨로 일본을 이긴다고 한 표현에서 소암의 실천이 어떠했는가는 향후 전개될 소암예술의 형성과정에서 충분히 짐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와 평생에 걸친 실천은 작가로 서 소암서예의 성격을 잡아가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제Il기 학서기(學書期)[31세(1937)-49세(1955)]

이 시기는 소암이 본격적인 서예가로서 일본에서 마츠모토 호우수이(松本芳翠)문하에서 3년, 츠지모토 시우은(辻本史邑)문하에서 8년간 사사(師事)하면서 구양순(九陽詢) 서풍(書風과) 왕희지 안진경계통의 행초서나 육조해(六朝楷)를 중심으로 전(篆) 예(隷) 해(楷) 행(行) 초(草) 등 모든 서체의 고전적 토대를 닦은 때이다.

특히 이 시기 츠지모토 시유우에게 20세기 근 현대 핵심서풍인 육조해(六朝楷)를 배운 것이 향후 완성기 소암예술의 성격이나 한국 근 현대 서단에서 그의 위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 시기 소암 글씨의 성격변화를 가져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에 대해 소암의 제자인 김종원은 다음과 같이 피력 하고 있다.

쓰지모토를 만난 후 그는[소암] 서(書)의 미의식(美意識)에 크나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우미(優美)한 서풍(書風) 탐미는 박소(樸素)로서의 반전(反轉)이다. 거기에 대두된 공부의 대상이 바로 육조(六朝)의 서풍(書風)이다.

요컨대 소암은 츠지모토 이유우를 통해 그 이전의 법도(法度)의 전형적인 「구성궁예천명 서풍에서 개성적인 아름다움으로서 육조해의 야취(野趣)를 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육조해는 향후 한국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30세기 서단의 새로운 시대서풍의 주류로 재해석되었고, 한국의 경우 결과적으로 츠지모토 이유우를 통해 소암이 육조해를 학습하고 재해석한 선구에서 섰던 인물이 되었다. 이즈음 일본의 명치서단(明治書壇)은 혁명적인 변화를 격고 있었는데 핵심배경의 하나가 바로 중국의 금석학자 양수경(楊守敬, 1837-1915)을 통해 츠지모토 시유우의 사부가 되는 구사가베메이카구(日下部鳴鶴, 1838-1922)에게 직접 전래된 육조해서였던 것이다. 쿠사까베는 바로 이러한 양수경 문하에서 중화서법(中華書法) 중심에 몰입해서 철저하게 그의 필법을 전수받았던 사람으로 근대 일본서도의 문을 열어젖힌 이와야이찌로꾸(巖谷-六), 니시카외슌토우(西川春洞)와 함께 명치삼필(明治三筆)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요컨대 소암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육조해를 다시 한국의 입장에서 재해석해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즈음 소암은 일본 국내 여러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하였는데, 매일전(每日展) 전일본서도전(全日本書道展)에 출품하여 수자례의 수상을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소암의 대표작으로는 예서 십곡병풍인 ‘중용수장(中庸首章)’ (1944년, 참고도판 1)과 ‘7언시’(참고도판 2)가 있다.


제Ⅲ기 성숙기(成熟期)[49세(1955)-73세(1979)]

이 시기는 소암이 일본 활동을 접고 1955년(49세) 한국으로 돌아온 후 1957년(51세) 국전입선을 시작으로 1979년(73세)까지 추천•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근 20년간 국전을 무대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 시기이다. 이 시기 소암의 주요 작품이력은 다음과 같다.

  • 51세(1957년) 제6회 국전에 에서 ‘십오야망월(十五夜望月)’을 출품하여 입선하다.
  • 53세(1959년) 제8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선정되다. 이후 국전 추천작가로 제9회(54세, 1960년) ‘금강산혈성루(金剛山歇惺樓)’ 제10회(55세, 1961년) ‘서산대사(西山大師) 시’ (참고도판 3) 제14회(59세, 1965년) ‘추일우성(秋日偶           成)’ 제15회(60년, 1966년) 가친 회암 현지준 시 ‘한라산(漢拏山)’ 제17회(62세, 1968년) ‘삼일포(三日浦)’ 를 출품하다.
  • 57세(1963년) 제11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유금강산(遊金剛山)’ ‘등산영루(登山映樓)’ 제16회(61세, 1967년) 가친 회암 현지준 시 ‘정방하폭(正房夏瀑)’ (참고도판 4) 제22회(67세, 1973년) 고운 최치원 시 ‘가양산(伽倻山)’ 제24회 (69세, 1975년) ‘진묵선사(震默禪師) 시’ 제26회(71세, 1977년) ‘금강경서(金剛經序)’ 제28회(73세, 1979년) ‘고시(磊寺)’를 출품하다.
  • 63세(1969년) 제18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처세훈(處世訓)’ 제19회(64세, 1970년) 한글 예서로 성삼문 시 ‘절개가’ (참고도판 5) 제20회(65세, 1971년) 한글 초서 이순신 장군 시 ‘단장가’ (참고도판 6) 제21회(66세, 1972년) ‘정방폭포(正房瀑布)’ 제23회(68세, 1974 년) 백헌(白軒) 시 ‘장안시동구(長安寺洞口)’ 제25회(70세, 1976년) 초서 제27회(72세, 1978년) ‘연영춘첩(淵永春帖)’ 을 출품하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 시기 소암은 당시 대부분 작가가 그러했듯이 ‘국전(國展)’ 이리는 공모전 장치를 통해 작가로 글씨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51세 때 제6회 국전입선 후 53세 바로 추천작가가 되고, 57세 심사위원 63세 초대작가가 각각 되면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국전출품을 통해 소암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성숙시켜나갔던 것에서 증명된다. 그리고 이 시기 소암의 글씨는 이미 일본에서의 학서기 서풍을 훨씬 벗어나 소암 예술역정에서 가장 활발한 실험과 연친을 통해 자기세계를 구축한 때로 자리매김 되어진다. 특히 소암은 격렬한 감정이 요동치는 듯한 리드미컬하면서도 강건•고박한 획질(劃質)의 육조해(六朝楷) 필법으로 왕희지의 전아(典雅)한 행초서(行草書)를 재해석하거나 한글 예서와 행서를 실험하면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더구나 이 시기 국전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의 서풍(書風) 일색으로 장악되고 있던 때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소전의 말대로 소암의 이러한 글씨는 당시 국내 작기들에게는 '이채(異彩)'로 다가온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서법(書法)의 관점에서 볼 때 이채는 전서를 토대로 행초와 한글을 재해석하고 있는 소전이고, 소암은 오히려 고전파로 분류될 수도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국전시절 육조해를 행초서로 재해석 해내는 소암의 이런 '실험'은 당시 한국서단의 실정에서 볼 때 단연 선구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당시 국전을 통해 육조풍의 작품을 발표한 작가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과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7-2006) 등인데 이들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한 시기로 볼 때 일본 중국에서 국내로 유입된 육조해를 주로 받아들인 후발주자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Ⅳ기 완성기(完成其) [73세(1979)-91세(1997)]

이 시기는 소암이 지금까지,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해 온 국전에도 일체 출품을 끊고 작가로서 완전 홀로서기에 들어갔던 때이다. 이즈음 소암은 또한 기존의 호를 버리고 ‘서방정토로 돌아간다’는 뜻의 ‘서귀소옹(西歸素翁)’을 자호하면서 먹고 자는 일 외에는 오직 글씨로 독락(獨樂)하고, 바람 나무 돌 바다와 하나 되게 제주자연에 파묻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켜갔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글씨는 자연에서 비롯된다[書肇自然]’고 했듯이 소암에게 있어서도 “한라산을 수없이 넘나들면서 눈에 포착되는 나뭇가지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생전고백은 바로 그의 예술실천과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더 이상 일상과 예술, 그리고 씀에 있어 작품과 연습의 경계도 없어진, 쓰는 것이 일상이고 일상이 곧 쓰는 것인 완성기 소암예술을 말할 때 빼놓을수 없는 것 또 한 가지가 술이다. 사실 그의 모든 작품이 취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꼬냑이 없으면 붓을 들지 않았다.

그러면 소암에게 있어 술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술을 위한 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제사장이 접신(接神)을 하듯 소암은 술을 매개로 필신(囀申)을 불러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물론 흥이 도도해져 붓과 술과 사람이 분간 안 되는 극도의 엑스타시 상태가 될 때도 있고, 그래서 비속(非俗) 환속(還俗)의 경지가 작품에 그대로 담겨지는 때도 많지만 애초부터 의도된 바는 아니라는 것이다. 소암의 작품에서 실제 ‘주부족(酉不足)’ (도록도판 87) ‘장진주사(將進酉辭)’ (도록도판 3) ‘취시선(醉是僊)’ (도록도판 88) ‘xo뿐’ (도록도판 86) ‘음주가(飮酒歌)’ (도록도판 39, 83) ‘무주무지(焦酒焦紙)’ (도록도판 84)등 헤아릴 수 없는 취필명작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법에서 법을 깨고 나오는 소암 작품의 경계는 어떤 가식도 없이 소암이라는 인간의 성정(性情)과 기질(氣質)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조형적으로도 이 시기 소암의 글씨는 그야말로 필획의 힘이 농익어 안으로 온축되면서 한자한글의 모든 서체를 한필로 따로 또 같이 노래하듯 구사하면서 탈속한 경지를 구가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 소암은 개성(個性)과 전형(典型) 즉, 육조해와 행초서의 이질적(異質的) 조형요소와 미감을 하나로 혼융(混融)시켜 가히 ‘소암체’라 할 탈속(脫俗)과 야취(野趣)의 행초서를 완성하였다.

지금까지 소암예술의 형성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았다. 요컨대 소암예술의 90평생을 4기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는데 ‘육조해로 재해석된 행초서의 거장’으로 요약된다. 그러면 이를 토대로 소암서예 성격의 핵심을 간단하게 짚어보자. 소암의 학서 과정을 살펴보면 육조해 이전에 당해나 행초 등 진(晉) 당(唐) 고법(古法)의 철저한 수련은 물론 이를 토대로 전서나 예서 한글 등 모든 서체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소암의 학서과정과 서예관의 일단을 보자.

구성궁체(九成宮體)가 이루어지려면 고정비(高貞碑)를 해야 합니다. 북위(北魏)의 고정비가 당대(唐代)의 구성궁체로 변한 겁니다. 그러니 그 기초를 닦아두면 어떤 체도 소화 기능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커야 합니다. 곱게 쓰는 것에서 시작하여 거칠게 쓰는 것에서 전개되어야 해요.

요컨대 여기서 소암은 육조해 이전에 구양순체의 정법(正法)을 체득하고 있음은 물론 글씨에 대한 철학도 지극히 정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소암은 한자 한글을 한필로 아우르는 행초서에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왕희지계통의 행초서나 한글 흘림을 육조해 필의로 재해석한 소암의 글씨는 이미 확인한 바대로 접(帖)과 비(碑)가 혼융된 결과물로 동시대 어떤 작가에게서도 쉽게 볼수 없는 성취임이 분명하다.

소암의 이러한 글씨는 운필(運筆) 용묵(用墨) 점획(點劃) 결구(結構) 장법(章法) 등 조형적 측면에서도 방원(方圓) 질삽(疾澁) 곡직(曲直) 등 서로 극단적으로 대비(對比)되는 음양(陰陽) 요소가 궁극적에서는 하나로 조화를 이루면서 성취되고 있다. 또 미학적으로 보면 야취(野趣)의 개성미와 전아(典雅)한 고전미가 조화되거나, 한 가지 필법으로 한 화면에 자유자재로 구사된 한글 한자는 모두 이질적인 양극단적 요소를 하나로 만나게 하면서 그 정신경계를 비속(非俗)과 환속(還俗)을 넘나드는 경계까지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소암서예는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예역사의 전개맥락에서 어떤 위치와 성격을 띠고 있을까.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20세기 한국 근 현대서예의 전개맥락을 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이에 대한 논의는 간간이 있어왔다. 하지만 매우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즉 20세기 이전인 18, 19 세기 조선 후기나 말기의 서예사적 전개맥락에서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예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지도 않았다. 또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단의 상황이나 서예동향을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하면서 전개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라는 정치 사회적인 이유를 들어 한국의 근 현대 서예역사를 단절에 역점을 두고 보고 있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20세기 근현대 한국서예 역사연구가 미진한 원인도 바로 이러한 측면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실제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단과 서예문회는 일상의 문자(文字)와 도구(道具) 재료(材料)에서부터 교육제도(敎育制度) 작가의 신분(身分) 등은 물론 서예에 대한 전통적인 심미의식(審曳意識)에 까지 모든 측면에서 이전 역시에서 볼 수 없었던 근원적인 변화를 경험하면서 복합적(複合的)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앞서 말한 정치 사회적인 이유와 함께 전통서예의 계승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 맥락 단절이라는 결론 쪽으로 작동하는 측면이 컷다. 하지만 갑골문(甲骨文) 북위(北魏)시대 해서체인 육조해(六朝楷) 등 일본이나 중국을 통해 새로운 문자자료의 발굴(發掘)과 도입(導入), 서구미술 유입, 서숙과 공모전을 통한 직업서가(職業書家)의 등장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단의 새로운 특질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단의 전개맥락도 이러한 다양한 변화의 토대위에서 전개된 만큼 시각을 달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서풍(書風)과 문자자료가 혼재한 때이자 서 숙과 공모전을 통한 사승관계 또한 단선적으로 전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별(作家別) 서체별(書體別) 성격을 분명하게 밝혀내기가 또한 쉽지 만은 않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근 현대 서단의 특질 하나가 서숙과 공모전을 통한 전문작가의 등장이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그 역사적 전개맥락을 작가(作家)와 서체(書體)서풍(書風)의 상관관계를 통해 밝혀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긴요한 일이다.

20세기 근현대 한국서단에서는 전(篆) 예(隷) 육조해(六朝楷) 당해(唐楷) 행(行) 초서(草書) 한글 서화겸수 실험서예 등 그야말로 유사 이래 만들어진 모든 계통의 글씨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근현대서예가 과거 어느 시기보다 다양한 서풍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표2>는 한국 근 현대사의 서체별 작가판도를 시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갑골문이나 육조해 실험적인 현대서는 20세기 근현대서단의 새로운 조류이자 육조해는 기존의 행초서와 혼융되면서 20세기 근 현대 서단에서 가장 특징적인 서풍으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임을 알수 있다.

그러나 시론임을 전제한 바와 같이 〈표2>의 구분은 그 대체적인 경향성에 따른 것으로 각 작가의 작품이 각각의 서체 카테고리에 완전히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즉 많은 작가들이 근 현대 이전과 같이 비파(碑派)와 첩파(帖派)의 구분을 넘어서 다양한 서풍을 소화해내고 있는 것이 이 시기 주요 특질의 하나인 것이다. 예컨대 손재형 김응현 김충현 현중화 유희강 등 전예나 육조해서 풍으로 행초를 구사해내는 이 시기 많은 작가들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런 맥락에서 근 현대 서단에서 소암의 위치를 보면 일본에서 츠지모토 시기다우 문하에서의 학서과정을 통해 육조해를 비교적 가 장먼저 학습하고 또 왕법(王法)중심의 행초서로 재해석을 시도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육조해를 토대로 행초를 재해석 해내는데 일가를 이룬 여러 작가 중에서 소암과 검여의 서풍비교를 통해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보자. 검여는 소암과 달리 28세(1938)부터 36세(1946)까지 약 8년간 중국에서 유학하였다. 검여는 여기서 고문(古文)과 금석학(金石學)을 연구하면서 향후 육조해 전문 서예가로서 대성할 수 있는 계기를 삼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육조해에 대한 소암의 해석방식을 여타작가와 비교해서 어떤 점이 다른가를 보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두 작가의 작품을 비교분석함에 있어 글씨의 모든 조형요소를 고려함이 마땅하나 여기서는 작품의 성질을 규명하는 기본이 되는 태세(太細) 질삽(疾澁) 근골(筋骨) 방원(方圓) 곡직(曲直) 등 획질(劃質)의 요소를 가지고 보도록 하겠다.

예컨대〈운뮥선사 시〉(1975년, 참고도판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암의 획질이 곡(曲)이면 〈만주(1974년, 참고도판 8) 의 검여는 직(直)이다. 마찬가지로 소암이 원필(圓筆)이 강하면 검여는 방필(方筆)이 훨씬 강하다. 이러한 이유로 소암의 획이 완만한 태세의 변화속에 골(骨)이 숨어있다면 검여는 급격한 태세변화와 함께 골(骨)이 드러나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면 같은 육조해 계통을 고수하면서도 이러한 획의 성질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근본적으로는 작가의 성정(性情)과 기질(氣質)에 근거하는 바가 크지만 여기에서 중요하게 보고자 하는 것은 육조해에 대한 해석방식의 차이점이다. 즉 육조암이 육조해를 왕희지 계통의 행토로 재해석을 시도했다면 검여는 오히려 고식 황정견 등 송대(宋代)나 유석암 강유위 조지겸 등 청대서가들의 글씨를 재해석한데서 이러한 미감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여 진다. 그래서 이 두 작가의 글씨에서 ‘야취(野趣)’라는 동일한 미감이 토대가 되고 있지만 전자와 후자는 뚜렷이 차별적이기도 한 것이다. 예컨대 소암의 글씨에서 전형의 미가 간취 된다는 검여는 개성의 아름다움이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도 또한 이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본 곳에서는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단에서 소암예술의 위치와 성격을 시대서풍과 소암서예의 형성과정과 특질의 비교 속에서 파악해보았다. 우리는 90평생에 걸친 소암의 예술인생은 일본에서의 3,40대 ‘학서기’ 에 뿌리를 내리고 5,60대 ‘국전시대’ 꽃을 피우며 7,80대 ‘서귀소옹시절’ 완성의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암글씨의 정화(精華)는 행초서(行草書)이다. 그것도 육조해의 개성(個性)과 왕희지 행초서의 전형(典型)이 만나면서 창출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서체(書體)와 미감(美感)에서 전혀 이질적(異質的)인 두 요소를 하나로 혼융(混融)해냄으로서 가히 '소암체' 라 할 독보적인 행초서의 경지가 이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이미 우리시대 최고 필력(筆力)과 안목(眼目)을 가진 손재형이 소암의 국전추천 작가시절인 53세(1959)때 그의 행초서를 “한국서단의 이채(異彩)”라고 평가한지 근 3,40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미 소암글씨의 성격이 ‘한국적(韓國的) 이다’거나 ‘아니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소암의 예술궤적에서 보아왔듯이 어디까지나 고전(古典)에서 퍼 올린 서법(書法)의 절대정신과 20세기 근 현대 서예의 보편적인 시대정신을 소암글씨에서 그대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서 소암예술의 세계성(世界性)까지도 동시에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암의 예술성취는 근 70년 전 “내가 이 글씨 쓰는 일에 대해 ‘이 길이다’고 판단한 것은 서예가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 글씨로 일본을 이겨야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고,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던 거지요. 그래서 글씨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고 말하면서도 일제시대 일본에서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본의가 무엇인지를 오늘에야 말이 아니라 작품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이제 전적으로 글씨만 가지고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단에서 소암의 위치를 보면 육조해의 수용과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다분히 선구적인 인물임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글씨공부를 위해 해외로 간 사례가 극히 희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소암의 경우 일본에서 20세기 근현대서예의 국제적인 동향과 함께 전적으로 육조해의 연구 해석방법을 토대로 완전히 자기세계를 구축했다는 측면에서 소암서예의 선구적인 성격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육조해의 본격적인 수용은 그 영향력으로 볼 때 중국을 통해서 직접 수용된 것이라기보다 일본을 통해 우회적으로 수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육조해의 수용관문이 중국이냐 일본이냐의 문제보다 그것을 수용하고 어떻게 여하히 내 것으로 소화해냈는가 하는 점이다. 요컨대 90평생에 걸친 소암예술의 성취는 서로 양극단처럼 보이는 육조해를 행초서로 혼융 재해석해냄으로서 우리시대 작가로서 보기 드문 완성을 보았다는데 모아진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단에서 19세기와의 차이는 소위 비첩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소암의 성취는 또 특별히 주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당시 작가들이 글씨의 근본을 육조해에 두더라도 그것이 진당의 고법과 행초, 그 이후의 송(宋) 원(元) 명(明) 청(淸) 제가의 필법이 혼융되어 구사되는 것이 여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분위기 속에서 소암은 육조해의 독자적인 해석으로 20세기 근현대 한국서예의 '이채(異彩)'를 띠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학서 과정을 통해 획득된 세계라는 점에서 이채(異彩)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소암이야 말로 가장 고전이면서도 가장 혁신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소암의 경우 오히려 20세기 근현대 일본서도의 특질 중의 하나인 전위서도가 일상적으로 행해지지 않은 것은 소암이 철저히 고법(古法)에 근거한 서예수련과 이를 통해 창신(創新)의 세계를 펼쳐내고 있다는 또 다른 반증인 것이다.

또 이런 맥락에서 소암은 근현대 한국 서예사 전개에서 육조해 해석의 선구로 자리매김 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최소한 20세기 한국서예는 19세기와의 단절이 아니라 비학(碑學)의 연속이자 또 비첩(碑帖)혼융의 시기로 볼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되는 것이다. 예컨대 추사가 중국에서 바로 들어온 한예(漢隷)를 토대로 비첩을 혼융하는데 성공했다면 소암은 일본에서 체득한 육조해를 토대로 행초를 구사하며 비첩을 혼융했던 것이다. 요컨대 20세기 한국 근 현대 서단에서 소암과 같이 제대로 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일제라는 ‘시대’와 국전이라는 ‘제도’는 물론 작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삼중고(三重苦)를 예술로 정면승부하면서도 걸림 없이 다 이겨 낼 때야 기능하다고 할수 있겠다.

소암 현중화는 한국 근대와 현대가 교차되는 길목에서 변혁의 한 획을 그은 서예가다. 소암의 서예는 자연을 바라보는 예리한 관찰력과 시대와 예술을 읽어내는 통찰洞察(insight)력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 자연스러운 리듬을 통해 작품에 개념을 담아내고 있다. 소암은 “쑥대나무, 백양나무, 이건 쭉 올라가고, 소나무 같은 것은 구불구불하고, 그러니 이걸 배우다 보면 자연과 통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들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의 예술과 자연에 대한 심미審美관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자연에서 서예의 묘妙를 찾았고, 서예를 통해 자연의 묘妙를 알았다. 소암은 자연의 물상을 본떠 나온 문자를 다시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해 작품이라는 형식에 담아 재탄생시킨 것이다.

1907년 제주에서 태어난 소암은 어려서부터 가학家學, 역대 비첩碑帖을 통해 우리 고유의 서풍을 탐구했다. 1924년 1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마치고 31세 때 마츠모토 호스이(松本芳翠, 1893~1971)에게 3년, 37세 때 츠지모토 시유(辻本史邑, 1895~1957)에게 8년간 북위서풍北魏書風을 비롯한 역대 비첩碑帖을 익혔다. 그 후 끊임없이 임서하고 비첩의 장점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49세가 되던 1954년에 제주濟州로 돌아온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한글서예가 궁체에만 치우쳐 있음을 보고, 한문 필법과 조형 형식을 적용하여 한글서예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 고민했다. 그 결과 소암체라는 한글서예 작품이 나오게 됐다. 91세에 세상을 뜨기까지 소암은 작품 <먹고 잠자고 쓰고> 와 같이 일상日常을 서예와 함께했다.

제주 풍경을 노래한〈영주십경瀛州十景>(1975)은 갈필渴筆과 발묵의 효과를 살려 역동성과 리듬을 담아내고 있다. 종이의 표면적 효과는 시간의 속도에 의해 시시각각 새로운 형상形象을 드러낸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드리핑(dripping)의 효과는 우연을 통해 화면에 농축된 공간을 만들어 주고, 획에 의한 표현은 단순한 대상의 재현을 넘어 리듬감과 생명감을 느낀다

소암의 글씨에는 자연의 순행원리가 담겨 있다. <영주십경>의 몇 글자는 번짐으로 인해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작품 전체를 망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암은 화면 전체가 하나의 춤사위와 같이 자연적인 흐름을 작품에 담아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면 마치 승무僧舞의 춤사 위가 보이는 것 같다. 그의 글씨는 조지훈 <승무>의 한 부분인 “소매는 길어 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휘어서 감기우고 다시 뻗어 접는 손 이”,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와 같다. 소매 속에 감추어진 손은 쉽 없이 움직 이지만 소매는 멈춘 듯하다. 춤사위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서예의 여백과 닮 은듯하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 호흡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작품 <산방춘사山房春事>(1983)는 판소리 장단 중 느린 진양조에서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장단이 담겨 있는 듯하다프. 그래서 이 작품은 역동적 필치와 절주로 침착통쾌沈着痛快함을 드러내고 있다. 침착과 통쾌란 기실 상반된 말이지만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내어 나타냄으로써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제자 류봉자柳鳳子(1946-)는 “언젠가 선생은 취흥醉興에 병풍 글씨를 쓰게 되었다. 18개의 바람 풍)虱자가 있었는데 다 다르게 나왔다”고 했다. 이와 같이 소암은 글자의 형태를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양한 형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지난至難한 학서 과정이 내면에 녹아 작품 속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의 해풍을 맞은 나무를 보면 드러나 있는 부분은 거칠고 바람에 흔들리지만 그 뿌리로 인해 강한 생명력을 나타낸다. 소암의 글씨도 해풍을 맞은 나무와 같이 부드러움과 강함을 보여준다. 그의 필획을 보면 부드러울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마르고 단단하기는 쇠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작품〈산방춘사>와 <영주십경>은 먹물이 떨어질 듯 화면에 닿으면 진양조에서 휘모리까지 역동적 필치가 펼쳐진다.

소암의 한글서예는 한문의 필법과 조형 원리를 융합했다. 우리는 개성적인 소암체 한글이 탄생하게 된 것에 주목해아 한다. 소암의 한글서예는 한문의 필법과 조형성을 한글작품에 녹여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암의 한글서예는 소암체의 원형성을 보여준다. 소암은 “한문서예를 공부하면 한글서예도 자연적으로 잘 쓸 수 있다. 한 글자 안에 같은 획이 들어 있으면 안 되고 모든 획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한문서예와 한글서예가 외형적인 형태만 다를 뿐 그 필법의 원리는 같다는 말이다.

한글 작품 <달아달아 밝은 달아>(1989)는 음력 7월 15일 여름에 쓴 작 품이다. 이 작품은 전래동요로 민중들의 희망을 노래한다. 글자의 자법字法의 변화를 통해 전체적인 조형공간을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구성하고 있다. 작가는 이 동요를 마음으로 느꼈다. 마음 가는 대로 붓이 가고, 또 붓이 가는 대로 마음이 따라가는 자연스러운 하모니 (harmony)를 보여준다.

소암은 끊임없이 자연 속에서 서예의 본질을 찾고 자연을 닮은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소암의 서예는 단지 외형의 닮음에 있지 않다. 문자에 대한 이해와 철학이 그의 내면에 들어와 녹여져 다시 서예작품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영감靈感을 준다. 제주 서귀포에 <소암기념관>이 있다. 소암은 평생 쌓아온 예술 흔적을 제주도에 기증했고, 제주도는 소암기념관을 세워 그의 예술혼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그는 자연에서 서예의 묘妙를 찾았고 다시 자연 속으로 돌아갔다. 그 자연 속에 소암이 있다.

지금도 소암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