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서양화가
1926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아버지 변태윤, 어머니 이사희의 5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호는 우성(宇城)이다.
1931년 6세가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이민을 떠났다.
1945년 오사카미술학교[大阪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도쿄로 상경하여 일본 서양화가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를 사사했다.
1947년 광풍회전(光風會展)와 일전(日展)에서 첫 입선한 뒤 1948년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최연소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이듬해 도쿄 시세이도화랑[資生堂畵廊]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50년부터 광풍회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7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일본 아카데미즘 미술에 기반을 둔 풍경화와 인물좌상을 그리면서 광풍회전과 일전을 중심으로 작가 활동을 지속했다.
귀국 이후 마포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1975년부터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재직하면서 고향인 제주도에 정착했다.
이후 줄곧 제주도에 머물며 황토색 바탕 위에 검은 필선으로 제주 특유의 거친 풍토와 정서를 담은 작품을 제작해 오다가 2013년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대표작으로는 「베로모의 여인」(1948),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1948), 「절도(絶島)」(1981), 「제주바다 1, 2」(1991)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예술과 풍토, 선·색채·형태에 관한 작가노트』(열화당, 1988)가 있다.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 홍성후
필자는 지난해 「고요 속에 격전을 담은 화가, 변시지」라는 글을 통해서 변시지(邊時志)의 삶과 예술을 진지하게 접근해보았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알고 있던 변시지와 그의 예술은 단편적인 편견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저 근현대미술사 내에서 독특한 화가의 일탈 정도라고 생각했다. 변시지의 작품을 시간 순서에 따라 삶을 대입해보니 그때서야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 그를 알고 나니 그의 예술이 이해되었고, 그의 예술을 알고 나니 그가 이해되는, 한마디로 ‘화여기인(畵如其人)’이었다. 변시지의 화폭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경계 사이에서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과 고양된 그의 감정상태가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시지라는 한 화가가 차지하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의 제 위치는 여전히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당대 화단의 중심에서 유행하는 미술 경향을 따르지 않은 점과, 전후(戰後) 일본화단에서의 활동과 70년대 중반 이후 고향 제주에서 작업을 한 화가라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이 공존한다. 전자는 그가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여 완전히 새로운 맥락에서 ‘변시지 미학’을 만들었다는 점이고, 후자는 그만의 미학이 미술사조 중심으로 서술되는 한국 근현대미술사 내에서 자연스럽게 해석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변시지는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 문하에서 사실적인 감각과 인상주의 화풍을 배워 일본화단에 등단하였다. 데라우치의 신뢰를 쌓아 광풍회(光風會)에서의 활동과 수차례의 입상, ‘광풍회 최고상’ 등의 수상을 통해서, 그는 이국에서의 정취를 자신의 정체성과 융합하여 독특한 서정성을 표출해 보였다. 귀국해서는 서울대학교, 제주대학교에서 교육자로, 그리고 꾸준히 화가로서 도약하였다. 귀국했을 당시의 한국의 미술계는 미국과 유럽에서 출발한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와 앵포르멜(informel)이 화두였지만, 변시지는 세밀한 사실성으로 고국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드러내는 비원파(秘苑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 아방가르드와 모노크롬이 미술계의 중심으로 떠올랐을 때도 화단의 중심에 서는 것을 거부하고 귀향하였다. 이 행위는 어쩌면 화단으로부터 고립시키고 개인을 고독하게 하였더라도, 제주의 풍광과 그의 내면에서 폭발하는 감정들의 결합으로써 변시지 고유의 독특한 미학을 도출하는 결과가 되었다.
귀향은 곧 변시지 예술의 ‘지역색’을 의미하였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변시지와 제주인에게 변시지 화폭 속에 재현된 제주풍경은 익숙한 것일지언정, 외지인에게는 다소 이색적인 풍경으로 보일 수 있다. 제주 출신의 화가들이 대개 자연을 벗 삼아 시시각각 변화하는 제주의 다양한 풍경들을 화폭에 담듯 변시지 또한 그러하였지만, 그의 작품이 가지는 차별화는 제주 풍경으로 대변한 격정적인 감정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정체성 모색의 정착지가 고향인 제주라는 것을 예술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이는 눈앞에 펼쳐진 비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제주의 풍경, 그리고 내면에 꿈틀대는 감정이 손끝을 지나 붓에서 캔버스로 전해진 과정이다.
지난 원고를 통해 변시지의 작품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를 중점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특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것은 변시지의 교우관계이다. 변시지의 작품은 상술하듯 겪어온 삶과 경험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가 고독과 정열의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과 스승,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변시지 예술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폭풍과 파도, 그 강렬한 감정은 그의 곁을 함께 한 이들에 대한 그리움, 그로부터 비롯된 고독한 감정의 결과이다. 이것은 곧 그의 작품적 소재가 되어 그의 사후에도 가장 제주다운 ‘제주화(濟州畵)’이자, 제주라는 특색을 벗어나서도 한국미술사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미술가로서 성장하기까지 그를 높이 평가하고 신뢰했던 데라우치 만지로, 성북구에 거주했을 당시 깊은 친분을 가졌던 전뢰진(田礌鎭)을 비롯한 비원파 화가들, 그리고 제주도에서 벗 삼은 제주의 자연과 동물, 무엇보다 그의 심리적 위안이자 동료였던 부인과 자녀들은 변시지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가 변시지 개인 삶의 조력자들이자, 창작적 동기가 된 이들이었다.
따라서 2장에서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일본(오사카-도쿄)에서의 행적과 인적 교류를 살펴볼 것이며, 3장에서는 1950년대부터 1975년 사이 서울(성북구)에서의 행적과 교류, 4장에서는 제주도(서귀포)에서의 행적을 살핌으로써 상기한 바를 검토해볼 것이다. 그의 작품의 미적 특질과 작품성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변시지의 예술세계에 대해서는 수차례 언급되어 오고 있다. 그의 삶을 살피려는 까닭은 그의 작품세계를 더욱 세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구체적인 행적들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그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읽어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일본에서 변시지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단연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삶이다. 일본으로부터의 강제합병 이후, 다수의 조선인들은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하여 도일(渡日)하였다. 주지하다시피 한일 강제합병은 곧 한반도 민족의 정기를 뿌리 채 흔드는 제국주의적 야심의 시작이었다. 조선인 삶의 방식도 큰 범주에서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복종이요, 다른 하나는 저항이었다. 그러나 서민의 삶에서 두 가지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 기록하지 않는 서민의 삶은 그저 자신의 터전에서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이었다.
변시지는 1926년 5월 29일, 제주 서귀포시 서홍동(西烘洞)에서 한학과 신학문에 조예가 깊은 변태윤(邊泰潤)과 이사희(李四姬) 사이에서 5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많은 농토와 재산을 소유해 재력 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아래에서도 자녀들의 교육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했다. 당시 제주는 오늘날만큼이나 육지와의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던 반면, 서울은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주를 오가며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점차 늘어나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부친은 시대적 상황이니 만큼 대다수의 지식인들의 배움터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여,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1931년 일본 오사카(大阪)로의 이주를 택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의 산업문명과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점진적인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상대적으로 식민지 조선에 견주어 볼 때 기회의 장(場)이었다. 그렇다면 부친은 왜 도쿄(東京)가 아니라 오사카를 선택했을까? 당시 조선인들은 목포와 여수, 부산, 제주 등 항구도시를 통해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오사카나 도쿄로 밀항하거나 이주하였다. 특히 오사카는 일본 자본주의 시장이 팽창됨에 따라 인구가 가장 밀집된 도쿄보다 노동시장의 조건과 환경이 안정적이었다. 값싼 노동력을 위해 일본은 제주도와 오사카 사이에 연락선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호를 운행함으로써, 오사카는 점차 조선인 노동자들이 늘어나 25%에 육박하는 조선인 밀집구역이 되었다. 부친 변태윤은 변시지와 자녀들이 비록 타국일지라도 스스로의 민족성을 잃지 않고자 조선인들이 많은 오사카를 택하였다.
부친은 변시지를 오사카에 위치한 하나조노(花園)소학교에 입학시켰다. 당시 하나조노소학교는 일본에서도 귀족 자제들이 입학하는 학교였다고 한다. 자녀의 교육을 아끼지 않았던 부친과 오사카에서 공장을 차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한 큰형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시지는 식민지에서 온 작은 조선인이라는 차별을 몸소 겪었고, 이때 씨름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 장애를 가지고 말았다. 그는 일본에서 사적(私的)으로는 ‘우시로 도키시(宇成時志)’로 불렸지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고 있었다. 청년부터 점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골몰히 모색하는 시점이 다가올 때, 그는 화가의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붓이 점차 무르익으면서 그의 화폭에는 조선적인 정체성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었다.
1940년 변시지가 오사카미술학교(大阪美術學校)에 입학했을 당시만 해도 일본은 팽창된 제국주의 야욕에 의하여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벌였다. 다리가 불편했기 때문에 징병을 피한 변시지는, 5년 뒤 일본의 패망과 한반도의 해방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학업에 한참 열중했던 그는 이미 어릴 적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일본에서 자라왔던 터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 잊은 채 학업에 더욱 매진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당시 그의 열정과 태도는 오사카미술학교 재학 당시 아틀리에에서 찍힌 그의 사진에 잘 나타난다. 짧은 머리에 눈이 반쯤 갈길 만큼 환한 젊은 미술학도의 미소는 순수함과 열정이 엿보인다.
그는 다른 미술학도들처럼 프랑스를 동경하여 유학을 꿈꿨다. 따라서 그 다음 행로는 도쿄 아테네 프랑세즈 불어과(アテネ·フランセ)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를 유학하고자 한 이유는 단연 일본에서 접한 양질의 화집을 통해 본 서양미술에 대한 환상이다. 우연히도 당시 변시지가 택한 릿쿄대학(立敎大學) 근처의 아틀리에 이름도 ‘파르테논(Parthenon)’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파르테논의 근방에는 가장 유럽의 화풍과 근접한, ‘서구적인’ 화풍을 구사하는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의 화실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데라우치는 일본 서양화의 거장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으로부터 서양화를 배운 인물이었고, 파르테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다. 데라우치와의 만남은 화가로서의 그에게 분명한 영향을 주었다. 그를 만난 이후 변시지는 문부성 주최의 《일전》과 《광풍회전》에서 연이은 입상을 했으며, ‘조선인’으로서 드물게 ‘광풍회 최고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퓨전회(フュウザン會), 가츠키사(槐樹社), 도코회(東光會) 등 설립을 주도하여 전위적인 미술을 보였던 미술계의 거장 사이토 요리(齋藤與里) 또한 변시지의 작품에 큰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화단에서의 관심이 해를 거듭하며 확장하게 되었다. 게다가 자부심 강한 긴자(銀座) 시세이도화랑(資生堂畵廊) 측이 변시지의 개인전을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1949년 《제1회 변시지 유화 개인 전람회》(도쿄 시세이도화랑)를 시작으로, 1951년 《제2회 변시지 개인전》(도쿄 시세이도화랑), 1953년 《제3회 변시지 작품전》(오사카 한큐[阪急]백화점 양화랑[洋畵廊])에 이르기까지, 당시 일본 미술가들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변시지가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라우치는 1949년 《제1회 변시지 유화 개인 전람회》의 리플렛에 실린 추천사에서 변시지의 작품이 “신선하고 청정(淸淨)”하며 “끊임없는 노력과 순진한 정진의 결과”를 보여준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데라우치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상당히 아낀 듯한데, 유독 변시지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그의 동료들도 서로를 아꼈다. 시세이도화랑의 벽면에 걸린 〈바이올린을 가진 남자〉 앞에서 데라우치와 동료들과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그들의 우정이 남달랐음이 짐작된다. 이후 2, 3회 개인전 사진에서도 이들은 화가로서, 동료로서 국경을 넘은 우정을 보인다.
데라우치는 변시지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화업을 더욱 확장하도록 하는 중요한 스승이었다. 당시 변시지의 개인전에서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 “데리우치 만지로 문하에서 물상(物象)과 진지하게 몰두하는 젊은이”, “데라우치 만지로씨의 …연상하게 하는…” 등은 그가 얼마나 스승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 비평가들은 변시지가 자신의 민족적 정신을 반영한 독자성에 주목을 하고 있었다. 변시지 개인으로서는 스승을 뛰어넘고자 하는 화가로서의 욕심이 있었을 터이다.
이 사제 관계는 조금 특별하였다. 패전한 일본에게는 변시지가 舊식민지이자 이웃나라 조선에서 온 학생이었으나, 데라우치는 변시지를 ‘조선인’으로 보지 않고 화가이자 제자로 어떠한 차별과 멸시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변시지 개인의 열정의 결과였지만, 그가 화가로서 성장하는 데는 편견 없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 데라우치의 역할이었다. 해방 후 혼란한 사회가 안정되어간 한국에서는 일본화단에서 성장해가는 조선인 변시지의 소식을 익히 듣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尹日善)과 미술대학 학장 장발(張勃)은 변시지에게 귀국하여 교편을 잡아주길 요청했고, 고민 끝에 변시지는 데라우치에게 소식을 전했다. 내막을 알 수 없지만, 데라우치는 제자의 성장을 위해 귀국을 받아들이고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 추천서는 이전 글에서 이미 전문을 인용한 바 있지만,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마음이 가장 잘 전달되기 때문에 이를 다시 인용하도록 한다.
변시지는 광풍회의 우수한 작가로서 《일본미술전람회(日本美術展覽會)》의 단골작가이다. 광풍회는 40여 년의 빛나는 역사를 가진 일본화단의 최고의 화회(畵會)이며, 많은 유명화가를 배출했던 《일전》은 문부성 주최의 《제국미술전람회(帝國美術展覽會)》, 《문부성미술전람회(文部省美術展覽會)》의 후신이고 일본화단의 주력이라 할 전람회이다. 변시지는 광풍회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입선자이며 최고상인 광풍상을 수상한 후, 한국인으로서 회원으로 추천된 유일한 사람임과 동시에 항상 《일전》에 입선한 출품작으로 여러 사람의 시선을 끈 바 있다. 변시지의 예술은 소박하고 청순한 열정이 내면적으로 드러나면서 티 없는 독자의 화경(畵境)을 만들어냈다. 이번에 변시지는 30여 년 살아왔던 일본을 떠나 조국인 한국에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그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은 더욱 그를 위해서 기쁘게 생각하는 바임과, 동시에 작게나마 나의 조그만 애정을 보내는 바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한국에 돌아가서도 일본에 있을 때처럼 진지하게 연구하던 시대를 생각하고 항상 원대심연(遠大深淵)한 예술세계를 잊지 말고 더욱 정진해서 대성할 것을 기대하며 그 성공을 마음으로 기도한다.
데라우치는 변시지가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한국미술계에 연고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데라우치는 이 추천서의 제명을 ‘변군을 보내는 말(邊君に送る言葉)’이라고 손수 적어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과 미술대학 학장 장발에게 보냈다. 결국 변시지는 지난 일본화단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스승의 작은 애정이 담긴 추천서를 품에 안아 ‘낯선 고국’으로 26년 만에 귀국하였다.
데라우치의 추천서를 들고 귀국한 변시지에게 고국이란 마치 낯선 ‘이국’과도 같았을 것이다. 한국에 특별한 연고도 없는 터라 그가 기댈 곳은 역시 혈육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본에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항일운동 이력이 있고 이후 제주대학교 학장을 역임한 그의 6촌 형 변시민(邊時敏)은 서울에 머물러 변시지의 숙식을 해결해주었고, 그렇게 변시지는 서울대 교수, 서라벌예술대학 미술과 과장, 마포고등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며 화단에서의 지평을 넓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작품활동 또한 활발히 진행했다. 이미 일본에서 평판이 자자했던 변시지의 귀국을 당대의 한국인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애꾸눈’이라는 필자는 변시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우성 변시지 화백을 거리에서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섯 살 때부터 일본에서 자란 씨(氏)의 말은 서툴렀지만 알아듣기 갑갑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그마한 키에 조그만 수염, 약간 저는 다리를 짤막한 단장에 의지한 것이 차라리 멋지다. 소학교 2년 때 씨름에서 당하는 애가 없어 결국은 5년생까지도 다 이겨내고 판을 쳤으나 그만 잘못해서 그때 다리를 다쳐 그로 인해 그림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 애꾸눈, 「모일모시」, 『경햔신문』 (1958. 6. 4).
‘애꾸눈’은 일본에서 명성을 얻고 귀국한 ‘재일조선인’ 변시지의 용모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의 언어를 대변해 당대 한국인들의 호기심이 엿보인다. 상기하듯 변시지는 아직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조선인들과 꾸준히 어울렸고, 가족들과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에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그는 ‘애꾸눈’과의 대화에서 “민족적 기반 위에 나의 예술을 세워야겠다는 것”을 느낀 이유로 귀국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다.
그의 귀국는 윤일선과 장발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으나 조선인에 대한 암묵적인 차별과 멸시뿐만 아니라 자신의 민족적 특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결정적인 역할로 작용하였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재일조선인’으로 취급되었다. 사회와 화단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그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서울대학교를 떠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야할 기로에 서게 되었지만, 더 이상 데라우치처럼 그를 전적으로 신뢰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으며, 그는 중견의 나이로 점차 접어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풍회에서의 화려한 수상 경력은 이전까지 화단에서 구상회화가 수용되고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귀국한 시기 한국화단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이하는 진통을 겪고 있었다. 광풍회 시절은 과거에 묻어두고, 화단에서의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다. 그러는 중 1960년, 변시지는 그의 작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평생의 반려자,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이학숙(李鶴淑)을 만나 결혼하였다.
변시지는 1960년 성북구 돈암동 19번지에 신혼집을 마련하였다. 그가 머물던 성북구는 한국 근현대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의 터전과도 같은 장소였다. 일찍이 김용준(金瑢俊)과 김환기(金煥基)의 ‘노시산방(老枾山房)’, 변관식(卞寬植)의 ‘돈암산방(敦岩山房)’, 배정국(裵正國)의 ‘승설암(勝雪庵)’, 한용운(韓龍雲)의 ‘심우장(尋牛莊)’,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있었으며, 그밖에 문인 이상(李箱), 박태원(朴泰遠) 등이 이곳에 거주하였다. 변시지가 돈암동에 거주할 당시의 성북구에 거주한 미술가들로는 김환기, 서세옥(徐世鈺), 송영수(宋榮洙), 유치웅(兪致雄), 박고석(朴古石), 정영렬(鄭永烈), 최만린(崔滿麟), 김종영(金鐘瑛), 권진규(權鎭圭), 변관식이 있었다. 그가 머물던 돈암동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는 동선동3가 251-13(현 권진규아틀리에)에 권진규가, 동선동3가 76번지 돈암산방에 변관식이 있었으며, 그밖에 동선동5가 45번지에 시인 신동엽(申東曄)이, 돈암동13 9통 6반에 소설가 박계주(朴啓周)가, 돈암동250번지에 소설가 오영수(吳永壽)가, 돈암동254-1번지에 주요섭(朱耀燮)이 거주하였다. 당시 성북구 일대에 머물던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성북구·성북문화재단 편, 『존재와 공간』(성북구립미술관, 2019) 참조.
그렇게 변시지는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성북구에서 당대 화단의 인물들과 폭넓게 교류할 수 있었고, 점차 화단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하였다.
1972년에 그는 돈암동34-17번지에 아틀리에를 구하고 ‘변시지 화가의 집’으로 이름 지었다. 당시 ‘변시지 화가의 집’은 도로를 마주하여 탁 트인 곳에 위치하였다. 그는 아틀리에 한켠에 휴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여 안락의자를 두고, 그 앞에 오사카미술학교 학생 시절에 그린 〈자화상〉(1944)을 이젤에 걸어두었다. 작업에 대한 열의가 식어갈 때 즈음, 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이었을까 싶다. ‘변시지 화가의 집’은 그가 개인 아틀리에를 두고 다작(多作)을 해야 할 만큼, 당시 그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변시지에게 다작을 요구한 그림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사실적인 고궁 묘사로 높은 수요가 있었던 ‘비원파(秘苑派)’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비원파에는 변시지를 비롯해 오지호(吳之湖), 도상봉(都相鳳), 손응성(孫應星), 천칠봉(千七峰), 이의주(李義柱), 장리석(張利錫) 등이 함께 했다. 이들은 당시 전후 세대를 중심으로 추상회화로 전이하는 화단 경향을 거부하고 한국적인 미감에 사실성을 더해 미술의 ‘한국성’과 ‘역사성’을 되찾고자 시도하였다. 변시지의 비원파 작품에 대한 관심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였다. 1971년 일본 오사카 후지화랑(富士畵廊)에서 열린 《제6회 우성 변시지 작품전》이 바로 그러했다. 〈애련정(愛蓮亭)〉, 〈어수문(魚水門)〉, 〈비원노목(秘苑老木)〉 등 세밀한 묘사의 비원화풍 작품들은 모던한 변시지의 작품을 기억하고 있는 일본 미술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경향신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실렸다.
현재 한국화단의 네오·오리엔탈리즘의 개척자로 알려진 변(邊)화백의 이번 개인전에는 비원 풍경 3점을 포함해서 총 18점의 작품이 전시되는데 비원과 그 밖의 고궁풍경을 주로 다룬 그의 작품은 한국의 전통과 미를 독특한 동양적인 화풍에 재현시키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변시지 작품전」, 『경향신문』(1971. 7. 22).
보도에서 알 수 있듯 변시지의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한국의 전통과 미’를 ‘동양적인 화풍’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당시 성북구에 거주한 다양한 화가들, 그리고 비원파와의 교류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적인 미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 이학숙과의 만남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학숙 또한 서울대학교 회화과 동양화부를 졸업하여 동양화가로서 활동 중이었고, 한국적 정체성과 동양적 미학을 정립하고자 고심했던 변시지에게는 둘도 없는 파트너였다.
유족에 따르면 변시지와 가장 가까웠던 미술가는 조각가 전뢰진(田礌鎭)이었다고 한다. 전뢰진의 부인 김한정은 1980년대에 상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한 바 있고, 이학숙과 서울대학교 동문이다. 전뢰진은 해방 이후 이쾌대(李快大)가 설립한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을 처음 배웠고 홍익대학교 조각과를 졸업했으며, 제4~6회 《국전》에서 특선을 받고 추천작가, 심사위원, 홍익대학교 부교수 및 조각과장을 역임한 바 있다. 변시지와의 관계는 성북구에 있을 때, 마포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을 때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시지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을 한 사례-〈자소상〉(1984)에서도 알 수 있듯 전뢰진을 비롯한 조각과들과도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이처럼 동양화가, 조각가들과의 교류는 그 스스로 예술에 제한도 두지 않은 채 다양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변시지는 비원파를 기점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정착하기 위하여 상당한 고심하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오리엔탈미술협회’의 창립이었다. “우리나라 고유한 동양적 화풍을 살리기 위한 화가들의 모임”으로 소개된 오리엔탈미술협회는 변시지의 주최로 1974년 12월 24일 저녁 7시, ‘미아리 화가의 집(변시지 화가의 집)’에서 공식적으로 창립되었다. 「오리엔탈미술협회 창립」, 『경향신문』(1974. 12. 24).
화단의 변혁, 즉 새로운 한국적 회화를 형성하려는 시도였다. 이듬해 열린 《오리엔탈미술협회 10인전》에는 회원 약 50명 중 10명-김인수(金仁洙), 박창복(朴昌福), 박성삼(朴性杉), 안병연(安秉淵), 윤여만(尹汝晩), 이명식(李明植), 이성근(李成根), 이승환(李承煥) 임창렬(任彰烈), 조정길(趙正吉)이 뜻을 함께 했으며, 찬조출품으로 변시지의 작품과 일본예술원(日本藝術院)에 요청하여 데라우치 만지로 작품을 함께 해 의의를 다졌다. 「오리엔탈미술협회 창립 10인전」, 『조선일보』(1975. 2. 20).
1964년 타계한 스승의 작품을 이곳에 선보인 것은, 그가 스스로 주최가 되어 미술계의 변혁을 꾀하려는 열정을 자신의 스승에게 헌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오리엔탈미술협회를 결성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변시지는 제주로의 귀향을 선택하였다. 오리엔탈미술협회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고, 서울을 오가면서 지속적으로 관여하였다. 돌연 귀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주된 까닭은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제안한 전임교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변시지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가족과 그의 아틀리에 ‘변시지 화가의 집’, 동료 화가들이 모두 서울에 있었으며, 화단은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서울을 떠나는 것은 화단과의 거리를 의미하였으며, 제주는 미술공간으로는 ‘미개척지’에 불과하였다. 『변시지: 폭풍의 화가』의 저자 서종택은 변시지의 귀향을 두고, “자신의 자기 동질성에 대한 실존적 반성의 측면이 우선되는 공간”이 바로 제주였으며, “작가의 순례자적 구도의 길에서 마침내 회귀하게 된 자기 정체성의 귀환점”, “자기 예술의 본령과 동일성과 친화성이 함께하는 자유의 공간-예술적 역량의 출발과 종착이 공존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서종택, 『변시지: 폭풍의 화가』(열화당, 2017), pp. 58~59.
이 표현은 변시지의 귀향을 가장 잘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화가들은 한국을 떠나 잇따른 해외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변시지 또한 도쿄 시절에 그랬듯, 프랑스를 흠모하여 해외진출을 고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변시지는 귀향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정신을 되찾고자 하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예상하였겠지만 제주로의 귀향은 고독과 창작의 진통 과정이었다. 제주에 귀향하였을 당시 변시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는 화려한 셔츠와 어울리지 않은 깊은 사색에 빠진 듯한 그의 어두운 표정이 눈에 띈다. 어두운 표정에 담긴 그의 심정은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그리운 애틋함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편지 잘 보았습니다. 충격을 주어서 미안하군요. 그러나 부부인걸 어쩝니까? 당신의 편지를 보는 순간 멀리 건너 보이지 않는 당신의 모습이 점점 가까이 나타나 내 곁에 있군요. 사랑해요.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생각해봅니다. 여보, 당신은 참으로 꼼꼼하고 차분하고 책임감 강한 남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일이든 꼭 성공하리라 믿어요(부인 이학숙).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고생이 심하십니까. 아버지의 그 고생이 언젠가는 인정받을 날이 오겠지요. 제가 빨리 커서 아버지를 편안히 모셔야 제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습니다. 저는 하루종일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엄마, 누나, 동생 모두 건강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날을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아들 변정훈). 서종택, 위의 책, pp. 62~63.
가족의 곁을 떠나 외로이 제주 생활을 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안이 되었던 것은 딸 변정은이 제주대학교 미술대학으로 진학함으로써 변시지와 함께 하였던 사실이다. 변시지는 특별한 행사나 기념일에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사실상 이산의 고통을 겪으며 외로운 제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에서도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북적였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는지 늘 고독이 함께 하였다. 외로울 때 그의 곁에서 말동무가 되어준 이들은 오히려 ‘말할 수 없는’ 대상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변시지의 화폭에서 자신을 의인화한 걸인(乞人)의 곁을 말없이 함께 하는 조랑말과 까마귀와 같은 동물이나 우두커니 솟아 있는 고목, 쓰러질 듯 초라한 초가집, 돌담 등이다. 일찍이 미술평론가 원동석은 화폭에 등장하는 대상들에서 변시지의 심리상태가 반영되었음을 감지하였다.
평범한 해변의 한 모서리, 한 두 그루 서 있는 나무, 초라한 초가집, 까마귀와 조랑말 등등. 그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브는 어찌 보면 흔한 소재의 취향이겠으나, 묵선의 운필에 따른 형태의 축약으로 생명의 리듬과 숨결을 부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바다에 포위된 섬의 모티브를 통해 해맑은 서정의 언어를 가시적으로 구성한 그림세계에서는 인간의 고독과 적막감, 기다림, 허망, 잔잔한 자신의 사라진 낭만 등 왜소한 자신의 존재감정과 더불어 부연의 자연으로 한없이 귀일하고자 하는 구도자적 명상이 담겨있다. 「제20회 수묵화 초대전」, 『제주신문』 (1983. 12. 10).
원동석만이 변시지의 화폭에서 외로운 화가 자신과 외로움을 달랠 말없는 대상들이 그려진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이구열 또한 “무사기(無邪氣)하게 자주 개입되는 변시지 자신의 그림 중 자화상 모습은 하나의 복합적 심리” 이구열, 「제주도에 귀착한 이색예술」, 『우성 변시지 화집』 (로얄프로세스, 1986), p. 157.
를 언급하기도 했듯, 변시지의 그림을 보는 이들은 모두가 그의 고독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그 감정은 점차 격화되었다. 제주에 막 정착했을 때의 화풍은 비원파에서 점차 밝아졌으나, 점차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커지며 황토색으로 물들다가 폭풍과 파도로 대변되는 감정적 격정으로, 때론 검은 화면이 지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다소 위험할 정도의 거센 자연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걸인,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대상들은 상기한 까마귀와 조랑말과 같은 ‘말할 수 없는’ 대상들이었다. 그 ‘말할 수 없는’ 대상들은 변시지의 제주 ‘벗’이라고 할 수 있다.
원동석이 변시지를 비평한데는 남부 지방화단의 교류에서 비롯되었다. 변시지는 제주대학 미술교육과 교수였으며, 원동석은 목포대학 미술과 교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화단이 형성된 것에 반발한 움직임으로 이들은 ‘80년대 새 문화정책’을 위한 ‘지방예술의 발전’에 자극제를 주고자 교류전을 실시하였다. 제주대학교에서는 변시지와 문기선(文基善), 양창보(梁昌普), 부현일(夫賢一), 허민자(許敏子), 허명순(許明順), 김택화(金澤和), 강광(姜光), 강영호(康榮浩), 강동언(康東彦)이, 목포대학교에서는 양인옥(梁寅玉), 박석규(朴錫奎), 신문용(愼文庸), 박윤서(朴允緖), 홍순모(洪淳模), 주우진(周尤津), 박복규(朴福奎), 김종호(金琮鎬) 등이 뜻을 함께 하였다. 원동석은 ‘지방미술의 육성과 발전의 방향에 대하여’라는 주제발표를 하고, 교수들이 모여 토론회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제주·목포대 교수 작품교류전」, 『동아일보』(1981. 7. 15).
이러한 교류전은 서울 중심의 화단을 타파하려는 작은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시지와 원동석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원동석은 『우성 변시지 화집』(1986)에 쓴 「제주도와 변시지 예술」에서 제주의 ‘지방적 특색’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변시지로 하여금 제주가 주는 공간성은 “고향에서 태어나 자란 경험과 예술가의 개별적 감성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세계”이다. 원동석, 「제주도와 변시지 예술」, 『우성 변시지 화집』 (로얄프로세스, 1986), p. 163.
당대 활발히 활동한 비평가 원동석과의 교류는 변시지에게 창작적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어느덧 ‘고독’은 그의 창작적 기류로 자리 잡았고, 제주에서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간 듯하다. 이윽고 그는 곧 제주의 화가이자 제주의 상징이 되었다. 서귀포 기당미술관은 1987년 ‘변시지 상설전시실’을 마련하고 그를 명예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2007년에는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Smithsonian Museum)이 그의 작품 〈난무〉, 〈이대로 가는 길〉을 상설 전시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미술로서의 제주라는 공간은 미개척지에서 변시지에 의해 ‘제주미술’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화가의 고민과 신념 끝에 이루어진 결과라고 하겠다. 그만큼 그의 화폭은 제주에서 출발하여 제주에 뿌리내린, 가장 ‘제주화(濟州畵)’답다. 그리고 변시지가 제주화를 만들기까지, 고독했던 심리와는 달리 변시지의 곁에는 늘 그를 신뢰한 스승과 화우들,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하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변시지는 일본과 한국이라는 국가 사이에서, 조선인·재일조선인·한국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 사이에서, 일본화단과 한국화단, 지방화단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무수히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가족의 유복한 경제적 지원 아래에서 오사카를 거쳐 도쿄로 이주하며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인복(人福)을 누리며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가 화가로서 도약하는 데에 있어서는, 데라우치 만지로라는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뢰를 바탕으로 화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던 데라우치는 그가 조선인임에도 그의 실력을 일본화단에 노출시켰다. 물론 변시지가 스승의 영향이라는 그림자를 넘어서 정체성을 화폭에 구현하고자 했고, 그럼으로써 화가로서 점차 비약해갔던 점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귀국한 변시지는 초기 재일조선인으로 평판을 받았으나 점차 적응해나갔다. 그러는 중 이학숙을 만나 화단에서의 지평과 인맥을 점차 넓혀갔다. 특히 성북구에 거주하였을 당시는 화가로서의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비원파의 일원으로서 당시 구상계열의 화가들인 오지호, 도상봉, 손응성, 천칠봉, 이의주, 장리석 등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으며, 이 시기부터 변시지 작품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였다. ‘변시지 화가의 집’을 구한 일도 빈번한 전시와 주문에 의하여 다작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본 광풍회에서의 활동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광풍회전에도 빈번히 작품을 출품하는가 하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을 이어갔다.
제주로 귀향하기 전까지는 오리엔탈미술협회를 창립함으로써 구상회화에서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전후 세대의 젊은 작가들을 이끌었던 것인데, 이는 귀향 이후의 작품 경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귀향 이후의 활동은 그가 화가로서 가장 무르익은, 화업에 있어서 절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전통의 회귀가 아닌 전통과의 융합을 추구하였던 화가로서, 귀향 이후 동양적 유화를 구상해 소위 ‘변시지 미학’을 창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변시지의 제주 활동은 주로 지방 화단과의 교류에 국한되었으나, 목포 등 제주와 가까운 지방의 화단과 활발히 교류를 진행해나갔다. 그중 원동석과의 만남은 변시지의 작품 성향을 뒷받침해주기도 하였다.
제주에서의 인적 교류는 주로 제주대학교를 비롯한 중앙화단 등 오랫동안 쌓아온 관계들이었으나, 그의 삶을 지탱해준 동료들은 무엇보다 제주의 자연과 동물(까마귀, 조랑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화폭에 그려진 자화상을 보면, 고독한 그의 형상 옆에는 늘 이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감히 그에게 가장 가까운 동료들이 제주의 자연과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늘 화폭에 ‘고독’을 담았음에도 말없이, 꿋꿋이 지켜주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변시지를 잇따라 조명하는 이유는 한국근현대미술사 내에 변시지를 밀어 넣는 시도가 아니라, 화단 내에서 독자성을 가진 한 화가의 풍토와 예술적 탈로(脫路)이라는 의미에서 공간을 확장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근현대미술사에서 변시지의 위치가 덜 연구되었다는 점에 있다. 이는 변시지의 작품이 다수 동료들의 미술 전개 방향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미술사에서 소외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달리 보면 당시 미술 사조나 유행을 따르기보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미학을 형성하여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변시지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기대되는 바이다.